본문 바로가기

일본 갤러리/정치경제

기시다 후미오의 파벌 굉지회(宏池会), 기시다파(岸田派)에 대해서①

728x90
반응형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지공회(志公会)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
지수회(志帥会)
굉지회(宏池会)
수월회(水月会)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


굉지회(宏池会, こうちかい)는 자민당 파벌 중에서 가장 오래된 파벌이다. 통칭은 기시다파(岸田派)다. 굉지회는 이케다 하야토(池田 勇人)가 사토 에사쿠(佐藤 栄作)와 절교를 하면서 만든 것이 시작이며, 통칭의 변천은 이케다파(池田派)→마에오파(前尾派)→오히라파(大平派)→스즈키파(鈴木派)→미야자와파(宮澤派)→가토파(加藤派)→고가파(古賀派)→기시다파(岸田派)로 이어진다. 독립한 파벌도 포함한다면 굉지회 영수의 출신지 및 지반은 주로 히로시마 현, 교토 현, 후쿠오카 현, 도호쿠 지방이다.

 

개요

 

기시다 후미오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의 직계 제자인 이케다 하야오에 의해 창립된 이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 正芳), 스즈키 젠코(鈴木 善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 喜一), 4명의 내각총리대신 및 자민당총재를 배출, 야당 시절에도 고노 요해이(河野 洋平), 타니가키 사다카즈(谷垣 禎一), 2명의 자민당총재가 나왔으며, 자타공인의 명문파벌이다.

원래 이케다 주위의 관료 출신의 의원들과 비서들을 중심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책적으로 정통한 의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정책에는 밝다고는 하지만 정쟁(정치)에는 어둡다는 평가를 받으며, '조정집단'이라는 야유를 받는 일도 많았다.

당초부터 이합집산을 반복해온 자민당 각 파벌과 비교해서, 파벌 회장 밑에서 일치결속(一致結束)한 파벌이었으며, 자민당 초창기에 정한 명칭을 지금까지 지속해 온 유일한 파벌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술하듯 파벌 내 항쟁과 연이 많았고, 특히 1993년 야당이 된 것을 계기로 파벌 내의 주도권 항쟁이 격화되어 분파와 합류를 반복해오고 있다.

독립한 파벌을 포함해 많은 자민당 총재를 배출했으며, 자민당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돌아오는 단계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총리대신을 눈 앞에 두고도 당내의 정국으로 인해 끝내 출마를 못하고 정치생명을 끝내가니, 병에 걸려 중도하차 하게 되고 죽게되는 비극적인 말로의 의원들이 많은 경향이 있다. 여담으로 엄청난 주당이었던 창설자 이케다 이후에도 마에오, 미야자와, 기시다가 전통적느로 엄청난 주당들로 갖추어진 파벌이라고 알려져있으며, 회합이나 연회 때 부외자들이 놀랄 정도의 광경을 벌인다고 알려져있다

 

구성원

임원

명예회장  회장 단장 부회장 사무총장 사무총장대리 사무국장 정책위원장 최고고문
고가 마고토
(古賀 誠)
기시다 후미오
(岸田 文雄)
하야시 요시마사
(林 芳正)
네무토 다쿠미
(根本 匠)
다케모토 나오카즈
(竹本 直一)
야아모토 고조
(山本 幸三)
네무토 다쿠미
(根本 匠)
오노데라 이츠노리
(小野寺 五典)

히라이 다쿠야
(平井 卓也)
가네코 야스시
(金子 恭之)
미츠야 노리오
(三ツ矢 憲生)
미야자와 요이치
(宮澤 洋一)
가네코 겐지로
(金子 原二郎)

중의원(34명)

<9선> 기시다 후미오(岸田 文雄)

<8선> 다케모토 나오카즈(竹本 直一), 네무토 다쿠미(根本 匠), 미야코시 미츠히로(宮腰 光寛), 야마모토 고조(山本 幸三)

<7선> 오노데라 이츠노리(小野寺 五典), 가네코 야스시(金子 恭之), 기타무라 세이고(北村 誠吾), 히라이 다쿠야(平井 卓也)

<6선> 가미카와 요코(上川 陽子), 미츠야 노리오(三ツ矢 憲生)

<5선> 사토 오키라(左藤 章), 데라다 미노루(寺田 稔), 하나시 야스히로(葉梨 康弘)

<4선> 기하라 세이지(木原 誠二), 모리야마 마사히토(盛山 正仁)

<3선> 이와타 가즈치카(岩田 和親), 고가 아츠시(古賀 篤), 고쿠바 고노스케(國場 幸之助), 고지마 도시후미(小島 敏文), 고바야시 후미아키(小林 史明), 다케이 슌스케(武井 俊輔), 츠지 기요토(辻 清人), 후지마루 사토시(藤丸 敏), 호리우치 노리코(堀内 詔子), 무라이 히데키(村井 英樹), 와타나베 고이치(渡辺 孝一)

<2선> 오니시 히로유키(大西 宏幸), 요시카와 다케루(吉川 赳)

<1선> 아제모토 쇼고(畦元 将吾), 가네코 슌페이(金子 俊平), 구니미츠 아야노(国光 文乃), 니시다 쇼지(西田 昭二), 후카자와 요이치(深澤 陽一)이 있다.

참의원(13명)

<5선> 하야시 요시마사(林 芳正)

<4선> 마츠야마 마사지(松山 政司)
<3선>  후지이 모토유키(藤井 基之), 미즈오치 도시에이(水落 敏栄)
<2선>
가네코 겐지로(金子 原二郎, 중의원5선), 미야자와 요이치(宮澤 洋一, 중의원3선), 이소자키 요시히코(磯崎 仁彦), 고가 유이치로(古賀 友一郎), 바바 세이시(馬場 成志), 모리야 히로시(森屋 宏), 
<1선> 아다치 도시유키(足立 敏之), 고야시 다카시(小鑓 隆史), 후지키 신야(藤木 眞也)

 

*2020년 5월 기준

정책

정책적으로는 보수파에 속하며, 특히 안전보장에 대해서는 미일관계를 중시하면서 비둘기파적 경향을 보인다.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이후, 매파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굉지회 재결집 때에는 자유파의 재결집을 보였다.

 

명칭에 대한 편찬

'굉지회(宏池会)'란 이름은, 후한(後漢)의 학자 마융의 "높은 언덕(高崗)의 정자에 엎드려, 광대한 못에 임한다(高崗の榭に臥し、以って宏池に臨む)"라는 광성송(広成頌)의 한 문구로부터, 양명학(陽明学)자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 正篤) 명명한 것이다. 이케다 하야토의 '池'과 이케다의 출신지인 히로시마의 히로와 같은 소리가 나는 '宏'를 이어붙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결성

 

이케다 하야토

 

1957년에 이케다 하야토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케다는 旧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파(요시다 학교) 내 동문이었던 사토 에사쿠(周山会, 주산회)와 헤어지면서 파벌을 만들었고, 이케다의 밑으로 마에오 시게사부로(前尾 繁三郎), 오히라 마사요시, 구로가네 야스미(黒金 泰美), 사즈키 젠코, 미야자와 기이치, 고사카 젠타로(小坂 善太郎) 등 관료계를 중심으로 한 인재들이 모였다. 또, 파벌의 브레인으로는 역시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 출신의 시모무라 오사무(下村 治)와 다무라 도시오(田村 敏雄) 등이 모여 정책을 입안했다.

 

마에오파(前尾派)와 오히라파(大平派) 시대

 

오히라 마사요시

 

이케다의 퇴진과 사망 후, 마에오 시게사부로가 주도권을 잡았으나, 사토의 4선을 허락한 마에오에게 불만을 가진 다나카 로쿠스케(田中 六助), 다자와 기치로(田沢 吉郎), 시오자키 쥰(塩崎 潤) 등 젊은 의원들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추대하고, 마에오를 회장으로부터 끌어내렸다. 이를 '오히라 쿠데타'라고 부른다.

오히라파에 당시 이토 마사요시(伊東 正義), 사이토 구니키치(斎藤 邦吉), 사사키 요시타케(佐々木 義武)가 '오히라파의 삼익조(三羽烏)'라 불렸다. 오히라는 시이나 재정(椎名裁定) 이후 총간분리(総幹分離, 총재와 간사장 분리-간사장은 총재의 파벌에서 뽑지 않는다) 관례를 부수고, 총재의 파벌이던 사이토 구니키치를 간사장으로 기용하고, 오히라-사토 라인으로 1979년 중의원 선거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파벌 내 중의원 수를 50명으로 늘려갔다.


스즈키파(鈴木派)와 미야자와파(宮澤派) 시대

 

스즈키 젠코

 

1980년 중의원 선거가 한창일 때, 오히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스즈키 젠코가 굉지회의 대표 및 총리가 되었다. 원래 스즈키는 총리는 물론 회장직을 맡을만한 인재가 아니었지만, 오히라의 후계를 둘러싸고 미야자와 기이치와 다나카 로쿠스케 사이에서 일어난 항쟁인 '일육전쟁(一六戦争)'으로 인해 결착을 맺을 때까지 맡는 다는 성격이 강했다.

미야자와는 일찌감치 장래가 촉망받는 존재였지만, 인재와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던 한편, 다나카는 스즈키 젠코의 옹립과 신자유 그룹과의 연립공작 등으로 존재감을 늘려갔다. 이러한 배경에는 미야자와를 싫어한다고 알려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 角栄)와 미야자와와 똑같이 대장성 출신인 후쿠다 다케오(福田 赳夫)에 의한 '가쿠후쿠 전쟁(角福戦争)'이 있었다.

스즈키의 퇴진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재 아래 '반주류파(半主流派)' 등과 함께 야유를 당했다. 니카이도(二階堂)옹립구상에서는 스즈키파 간부가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미야자와와 다나카 로쿠스케의 후계 경쟁은 다나카의 사망으로 미야자와가 계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미야자와는 다케시타 노보루(竹下 登), 아베 신타로와 포스트(post) 나카소네를 경쟁했으나 1987년 나카소네 재정(裁定)에 의해 다케시타가 패배하게 되었다.

 

미야자와 기이치

 

미야자와는 1991년 다케시타파의 지지와 함께 염원하던 총재 자리에 올랐으나, 다케시타파가 분열하는 일이 방아쇠가 되어 자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야당 전락 후 미야자와는 회장에 유임했고, 굉지회의 고노 요헤이가 총재가 되고, 1994년에 자사사(自社さ, 자유민주당·일본사회당·신당사기가케) 연립정권을 실현하면서 여당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고노 총재의 임기 중부터 미야자와의 후계 다툼도 얽혀, 가토 고이치(加藤 紘一)와 고노의 대립(KK대립)이 심각해졌고, 가토가 1995년 총재 선거에서 하시모토 슈타로(橋本 龍太郎)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노는 총재 연임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노는 총리에 취임하지 않은 최초의 자민당 총재가 되었다.

미야자와의 후계를 둔 대립은 그 이후에도 계속 벌어졌지만, 미야자와가 가토에게 파벌의 승계를 결정한 1998년 12월에 고노는 결국 파벌을 이탈하고 파벌 내의 반(反)가토 의원들을 모아 1999년 1월에 대용회(大勇会)를 결성했다. 오랜 결속을 해 온 굉지회에게 있어서 이것은 최초의 분열이었지만, 다음 해에는 한층 더 큰 격전이 닥쳐오게 되었다.

 

가토의 난과 파벌의 분열

가토 고이치

2000년 11월에 야당에서 제출된 모리 내각 불신임안에 가토는 동조하였지만, 파벌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 되지 않자 좋던 기세는 점점 수그러들어 끝나게 되었다(가토의 난). 그 결과, 가토를 지지하는 그룹과 반가토 그룹(호리우치파(堀内派))으로 분열되었고, 각각의 파는 서로 자신을 굉지회라고 이름 부르는 이상한 사태가 되었다(가토 그룹은 2년 후에 가토가 비서 스캔들로 의원직을 사직하면서 오자토 사다토시(小里 貞利)가 승계하게 되었고, 그 이후 오자토가 정계를 은퇴하고 2005년 9월 26일 파벌 총회에서 타니가키 사다카즈(谷垣 禎一)가 회장에 취임함). 그렇게 굉지회는 고가파(古賀派)와 타니가키파(谷垣派)로 나뉘게 되었다.

 

기시다 후미오의 파벌 굉지회(宏池会), 기시다파(岸田派)에 대해서②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