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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갤러리/정치경제

다케시타 와타루의 파벌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 다케시타파(竹下派)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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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지공회(志公会)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
지수회(志帥会)
굉지회(宏池会)
수월회(水月会)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는 보수본류를 대표하는 파벌이다. 현재 중의원 총 54명의 의원이 속해 있는 자민당 내 제3파벌이며, 다케시타 와타루가 회장으로 있다. 보수합동 시기의 자유당계의 목요클럽을 계승하며,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든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무라 신을 중심으로 1987년 7월 경세회를 결성한 것이 기원이다.

 

다케시타 노보루파(竹下登派) 시대

 

다케시타 노보루

 

1985년 2월 7일, 자민당을 탈당한 후에도 파벌 영수로써 영향력을 이어나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 角栄)에 반기를 든 다케시타 노보루(竹下 登), 가네마루 신(金丸 信)을 중심으로 목요 클럽(木曜クラブ) 내에서 공부회인 창정회(創政会)가 결성되었다. 다나카의 세찬 반격을 당했으나, 27일에 뇌경색이 일어나, 다나카는 정치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다케시타의 우세가 정해졌다.

1986년 4월 25일, 창정회는 해산되었고, 반대파와 중간 파벌을 흡수했다. 1987년 2월 28일, 국회편람(国会便覧) 제75판이 발행된 시점을 기준으로 목요클럽, 통칭 다나카파의 소속의원은 139명이었다.

같은해 5월 21일, 도쿄 프린스호텔에서 열린 파티 '다케시타 노보루 자민당 간사장 격려 저녁 모임'에서는 사상 최대인 1만 3천명이 모였고, 다나카파로부터 참가자는 128명으로 90%이상을 달성했다. 결석한 니카이도(二階堂) 그룹의 의원은 13명으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였다. 7월 1일, 다나카파의 상임간사회가 열렀으나, 총재 후보 단일화를 위한 니카이도 그룹과 다케시다 그룹의 회담은 결렬되었고, 마침내 다나카파의 분열이 결정됐다.

7월 4일, 신파벌인 경세회(経世会)가 참가의원 총 113명으로 결성되었다. 파벌명은 민생과 경제를 의미하는 중국의 고전인 '경세제민(経世済民)'에서 따왔다. 회장에는 다케시타가 취임했고, 다케시타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141명의 의원이 있던 다나카파는 다케시타파, 목요클럽(니카이도 그룹), 중립계 3개 그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9월 1일, 국회편람 제76판이 발행된 시점에서 소속 수는 다케시타파 114명, 목요클럽 15명, 중립계 12명이었다.

10월 20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재정(中曽根康弘裁定)에 의해, 다케시타,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 미야자와 기이치(宮澤 喜一) 3명은 다케시타를 차기 자민당 총재로 내정했다. 11월 6일 다케시타 내각이 시작되었고, 다케시타파는 121명으로 늘었다. 다케시타 총리 취임 후, 가네마루 신이 경세회 회장에 취임했다.

다케시타가 리크루트 사건으로 퇴임한 후에도, 최대 파벌로써 인사와 자금 양면에서 자민당을, 더 나아가 일본 정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여 '경세회지배(経世会支配)'라 불렸다. 또, 이 시기에는 다케시타파 칠봉회(七奉行)라 불리는 실력정치가들이 있었다. 리더에 의한 철의 지배가 남아있는 경세회는 '일치결속•도시락통(一致結束・箱弁当)'라 형용되었다. 파벌명이 바뀐 지금도 이 파벌을 경세회란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 시기의 영향력에 의해서다.

다케시타팡 유력간부는 나가타쵸(永田町)의 TBR빌딩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었는데, 일본의 고급관료와 미국 고위 관료가 총리대신관저보다도 TBR빌딩을 우선적으로 방문하였는데, 이는 총리의 권위 저하와 경세회지배의 상징이었다.

원래는 다케시타가 회장이었으나, 다케시타의 부재 동안 잠시 맡을 예정이던 가네마루가 다케시타 퇴진 후이도 회장에 유임해 일본에 영향을 끼치는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로 인해 최고권력자인 다케시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특히, 가네마루의 제자인 오자와 이치로(小沢 一郎)가 자민당간사장에 퇴임한 후에 경세회 회장대리에 취임하였고, 가네마루의 비호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른 것은 다케시타와 가꺼운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이 시기에는, 가이후(海部) 내각의 중의원 해산에 대해 오자와가 반대하여 가이후 내각이 총퇴직하게 만든 '가이후 끌어내리기(海部おろし)' 등의 움직임이 있었고, 가이후 내각에서 미야자와(宮澤) 내각에 이르게 되는 시기는, 가네마루, 다케시타, 오자와를 일클어 '곤치쿠쇼(金竹小,こんちくしょう)'가 정부 및 자민등 실권을 장악했다.

1992년 10월 14일, 가네마루는 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東京佐川急便事件)의 책임을 지고, 의원 퇴직서를 제출, 회장도 퇴임했다. 10월 16일, 경세회 총회가 열렸다. 출석자는 소속의원 109명 중 93명, 다케시타파를 지지해온 칠봉회가 여기서 딱 두 동강 났다. 

오자와 그룹에는 오쿠다 게이와(奥田 敬和), 와타나베 고조(渡部 恒三)와 오자와 3명, 反오자와 그룹에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 龍太郎), 오부치 게이조(小渕 恵三),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 静六) 3명이었다. 파벌의 미래를 결정 짓게 된 사람은 이때까지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하타 쓰토무(羽田 孜)가 되었다. 하타는 총회가 끝나고 바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로 향했다. 호텔의 한 방에 들어가자, 오자와를 포함한 지지자들이 있었고, 오쿠다는 경세회 新회장에게 한 장의 문서를 하타에게 보여줬다. 누구를 옹립하는 지는 적혀있지 않았지만, 하타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이 회합에서 오자와 지지 그룹의 '하타 회장 구상(羽田会長構想)'이 시작되었다.

이 항쟁으로 인해, 反오자와 그룹은 오부치를 추대하는 방침을 정했다. 중의원은 수가 대등했었으나, 실권을 가지고 온 다케시타가 참의원은 反오자와로 뭉칠 수 있도록 아오키 미키오(青木 幹雄)에게 지시했고, 이에 더해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가 재무상으로 있던 하타의 파벌 활동이 지나치다고 경고했다.

10월 21일, 참원운영위원회에 가네마루의 의원서가 수리되었다. 당일 아침, 국회 지구의 캐피탈 토큐 호텔(キャピトル東急ホテル) 앞에서 '하타 옹립 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전 10시, 최고 간부회가 열렀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네마루가 오자와에게 '곧바로 사무소로 와라'라고 전화했다. 오자와가 그곳으로 가자 가네마루는 '언제까지 아이처럼 싸움을 할거냐'라고 질책했다. 가네마루 옆에는 다케시타가 있었다. '지금은 오부치로 갈 수 밖에 없지 않나. 적이 적은 것이 최우선이다.'라고 다케시타는 말했다. '참원 경세회를 움직이는 것은 다케시타 씨네요. 납득되지 않습니다. 비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자네는 어린 것이다. 참원의 오부치대망론이 균열의 틈을 막을 수 있다', '너의 인식은 항상 이상하다.'(金丸は「いつまで子供みたいな喧嘩をしてるんだ」と叱責した。金丸の隣には竹下がいた。「ここは小渕で行くしかないだろう。敵が少ないのがこの際一番だ」と竹下は言った。「参院経世会を動かしたのは竹下さんですね。納得できません。卑劣じゃないですか」「だから君は若いんだ。参院の小渕待望論が亀裂の溝を埋めるんだ」「あなたの認識はずっとおかしい」)

다케시타의 설득은 평행선을 이어 갔고, 오자와는 듣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후에 재개된 최고간부회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오전 0시에 가까워졌을 때, 단장직의 하라다 겐(原田 憲)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회장에는 오부치가 적임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말했다. 10월 28일 오전 11시부터 시작한 임시총회에서 절반이 강제로 오부치의 회장 취임을 결정했다. 이로부터 5시간 후, 하타는 정책집단 '개혁포럼 21(改革フォーラム21)'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12월 18일, 오자와 지지 그룹은 '개혁포럼21'을 파벌로 바꾸었고, 44명으로 구성된 그룹 '하타파(羽田派)'를 정식으로 결성했다. 이것으로 인해 다케시타파는 당내 제4파벌의 오부치파(小渕派)와 하타파로 분열되었다. 


오부치파(小渕派) 시대

 

오부치 게이조

 

1993년 6월, 하타와 오자와파는 탈당을 하고 신생당(新生党)을 결성했고,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를 총리로 하는 비민주당 정권을 수립했다.

호소카와 및 하타 내각과 비민주당 정권이 단기간에 붕괴했고, 무라야마(村山) 내각이 성립됐고 민주당이 여당으로 복귀했다. 오부치파도 2위 세력으로 돌아왔다. 1995년 총재선거에서 다케시타는 파벌간부인 하시모토 류타로 옹립을 결정했다. 총재 취임 후, 1996년 1월 무라야마 내각 퇴진으로, 후임 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그 사이, 당 내 파벌 해소 운동과, 小파벌로 전락해 사무소 유지비가 어려워지자, 다나카파 시대부터 들어가 있던 사보회관(砂防会館)에서 경세회 간판을 내리고, 헤이세이정치연구회(平成政治研究会)로 명칭을 바꿨다. 그 이후,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로 다시 변경했다.

1998년 7월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자, 다케시타는 즉시 총리와 총재 자리를 하시모토로부터 파벌회장에 있는 오부치에게 넘겨주도록 지시했다. 후계의 회장으로는 와타누키 다미스케(綿貫 民輔)가 취임했다. 이 결정을 불복한다는 이유로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 静六)가 파벌을 떠나 독자적으로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다케시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郎)를 출마시켜 3파전의 그림을 만들었고, 이때까지 '일치결속•도시락통(一致結束・箱弁当)'라고 불린 오부치파가 처음으로 균열을 보였다. 이 즈음부터 파벌의 아킬레스건으로 오부치파 후계자가 부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장래를 이을 예정이었던 젊은 의원들이 대부분 오자와와 하타와 함께 자민당을 탈당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파(橋本派)

 

하시모토 류타로

 

2000년에 오부치와 다케시타가 연이어 사망했다. 7월 와타누키가 중의원 의장으로 취임해 파벌을 탈당했기 때문에 하시모토가 후임으로 회장직에 취임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파벌의 실권을 가지고 있던 것은 노나카 히로무(野中 広務)와 아오키 미키오(青木 幹雄)였다.

하시모토는 2001년 4월 모리 총재의 후임으로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고이즈 준이치로에게 대패했다. 다나카파 이후, '일치결속•도시락통(一致結束・箱弁当)'이라 불린 철의 단결을 자랑했으나, 고이즈미 정권 성립 이후에 총재 후보가 부재하면서 구심력이 저하됐다. 또, 가쿠후쿠전쟁(角福戦争) 이후 원한을 가지고 있던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저항세력'으로 분류되어 눈앞의 적이라는 존재가 되었고, 고이즈미 정권에서는 2003년 9월까지 하시모토파는 당집행부에서 제외됐다. 하시모토파가 당집행부에 제외된 것은 다나카파 시대의 미키(三木) 정권 이후 25년만이었다.

2003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의해, 反고이즈미의 선봉에 서있던 노나카가 독자 후보 옹립을 주장했으나, 아오키 미키오와 무라오카 가네조(村岡 兼造)가 고이즈미 지지를 표명하여 노나카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총지 선거가 한창일 때 노나카는 이것을 이유로 의원 은퇴를 표명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파벌 내에서는 사사가와 다카시(笹川 尭), 쿠마시로 아키히코(熊代 昭彦) 등 다수의 의원이 공연하게 출마 의욕을 보이는 등 큰 혼란이 있었으나, 최후적으로 후지이 다카오(藤井 孝男)를 옹립했다. 파벌의 지지를 하나로 모으지 못 한 후지이는 낙선했고, 고이즈미가 다시 당선됐다.

2004년 노나카 히로무와 아오키 미키오가 입회하는 형식으로 하시모토가 1억엔의 헌금을 받고, 정치수지보고서에 암헌금(闇献金)으로써 수리한 의혹인 일본치과의사연맹 정치자금 사건(日歯連闇献金事件)이 들어났다. 2004년 7월 30일, 하시모토는 책임을 지는 형태로 회장을 퇴임하고, 파벌을 떠나고, 2005년 중의원 해산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그 이후, 와타누키 다미스케(綿貫 民輔) 전 중의원 의장, 이어서 호리 고스케(保利 耕輔) 전 자치대신(自治大臣) 겸 국가공안위원회(国家公安委員会) 위원장의 회장취임 목소리가 나왔으나, 두 명은 사양했다.

더욱이, 우정국회에서의 우정 법안의 대응을 둘러싸고 2005년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와타누키와 호리의 법안 반대 그룹이 비공인되어 당 내 제1파벌 자리를 모리파(森派)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쓰시마파(津島派) 시대

 

쓰시마 유지

 

회장 부재 상태가 이어졌으나, 제3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이 성립되고 4일 후인 2005년 11월 4일, 회장에 쓰시마 유지(津島 雄二)가 취임했다. 2003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이후, 파벌 내에서 계속된 중의원과 참의원의 응어리 해소라는 큰 과제가 있었다. 또한, 중의원 간부의 대다수가 1993년 이후 정계재편 속에서 탈당 후에 복당한 의원이거나 방계(外様)의원이었고, 토박이 의원은 누카가 등 소수였다. 회장 쓰시마도 이전에는 旧 미야자와파(宮澤派) 출신의 복당 의원이었다.

원래 경세회 분열과 그 이후 거짓말쟁이 해산(嘘つき解散, 1993년 중의원 해산의 통칭)으로 인해, 후나다 하지메(船田 元), 하토야마 구니오(鳩山 邦夫) 등 장래를 맡아야할 의원들이 탈당 내지 파벌 이탈을 하고(이후 대부분 복귀했으나, 하토야마는 다시 자민당을 탈당했고 후나다는 낙선했다), "NYKK" 중 한명이라 불린 나카무라 기시로(中村 喜四郎, 현재는 무소속)가 제네콘 비리사건으로 실각하는 등, 인재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후지이 다카오(藤井 孝男), 스즈키 무네오(鈴木 宗男), 누카가 후쿠시로(額賀 福志郎)가 정치계 트리오(御三家, 고센케)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스즈키가 2002년 비리사건으로 실각으로 탈당과 하시모토파 이탈을 하게되었고, 후지이도 2005년 우정정국(郵政政局)으로 탈당 및 낙선했다. 

이로 인해 최후까지 남은 누카가 후쿠시로를 총리 총재 후보로 키워나가자는 의견이 강했으나, 규마 후미오(久間 章生)와 아오키 미키오가 총재 선거에서 누카가 옹립에 찬성을 하지 않는 등, 자타공인이 인정하는 총리총재후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하토야마 구니오는 파벌 복귀 후에도 아소 타로의 맹우로써 활동했고, 파벌과의 행동을 통일하지 않았다. 더욱이, 우정 반대 그룹으로 복귀한 의원이 많아 타 파벌에 이적하거나 무파벌로 나가는 등 도움을 줄 간부가 부재했다.

2007년 제21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가타야마 도라노스케(片山 虎之助) 참의원 간사장을 시작으로, 다케미 게이조(武見 敬三) 후생노동 부대신(厚生労働副大臣), 아오키 미키오 참의원 의원회장의 고향인 시마네현(島根県) 출신의 가게야마 슌타로(景山 俊太郎) 등 의원 입후보자가 연이어 낙선하고, 참의원에서도 마치무라파(町村派)에게 밀려 제2파벌이 되었다.

2008년 후쿠다 시게오 총재 퇴임 표명으로 인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소 타로와 요사노 가오루(与謝 野馨)에게 지지를 표명한 파벌 간부가 나오는 도중에, 젊은 의원과 중견 의원을 중심으로 이시바 시게루(石破 茂)를 옹립하였다.

총재 선거 이후, 하토야마 구니오를 중심으로 도이다 도오루(戸井 田徹), 요시가와 다카모리(吉川 貴盛), 마와타리 다츠하루(馬渡 龍治), 다무라 노리히사(田村 憲久), 가와이 가츠유키(河井 克行), 통칭 하토야마 5인조(鳩山5人組)가 분파 행동을 시작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토야마가 총무대신(総務大臣)에서 경질당하자, 집단이탈에 대한 걱정이 생겼었다.

2009년 7월 19일, 회장인 쓰시마 유지가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에 불출마 및 정계은퇴를 표명했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결당 이래 처음으로 중의원 제1당 의석을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고, 헤이세연은 이전 45석의 1/3 수준인 14석으로 세력이 줄어들었다.

 

누카가파(額賀派) 시대

 

누카가 후쿠시로

 

2009년 9월 8일, 쓰시마 유우지의 은퇴와 총재 선거 대패의 결과로 임시총회가 실시되었고, 회장대리의 누카가 후쿠시로(額賀 福志郎)가 회장에 취임했다. 

누카가 회장 취임 후, 정계 재편과 신당 결성 등을 주장해온 하토야마 구미오(鳩山 邦夫)가 탈당하고, 파벌 해소를 주장한 이시바 시게루가 2011년에 정조회장(政調会長)을 이임한 후에 파벌에 복귀하지 않고 이탈하는 등 소속의원의 수 감소가 이어져 당 내 제3파벌로 밀려났다. 2012년 총재선거에서도 파벌 내에서 후보를 옹립하지 못했으나,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대승의 영향으로 49석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당내 제2파벌로 복귀했다.

하지만, 2015년 총재선거에서 독자후보를 옹립하지 못했고, 더욱이 2017년에 아소 타로(麻生 太郎)가 지공회(志公会)를 결성하여 다시 당내 제3파벌로 밀려나게 되었다. 아베 내각의 주류파로 있었지만, 누카가의 구심력에 물음표가 있었다.


다케시타 와타루파(竹下亘派) 시대

 

다케시타 와타루

 

누카가 취임 이후, 파벌 내에서 지도력에 불만이 계속되었으나, 2018년 1월에 참의원 간사장에 참의원 해이세이연구회 회장의 요시다 히로미(吉田 博美)를 중심으로 파벌 내의 참의원 의원이 집단 이탈을 두둔하며 누카가의 퇴임을 요구했다. 누카가는 3월에 퇴임하는 것을 표명했고, 후임으로 창설자인 다케시타의 이복동생인 다케시타 와타루를 지명했다.

4월에 다케시타가 회장에 취임했고, 이로인해 26년만에 다케시타파(竹下派)가 부활했다. 회장대행에는 모테기 도시미츠(茂木 敏充)와 요시다를 앉혔다.

9월 총재 선거에서는 다케시타는 파벌을 결속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나, 파벌 내의 중의원 의원의 다수는 현 총재의 아베 신조를 지지하는 한편, 참의원 측에서는 아오키 미키오의 영향 등으로 대항마인 이시바 시게루를 지지하면서 중참이 분열되었다. 

2019년 1월 9일, 다케시타가 기자회견에서 식도암에 걸렸다는 것을 밝혔으며, 회장직은 계속하나, 파벌의 운영은 최고고문인 누카가, 회장대행의 모테기와 요시다에게 맡긴다고 밝혔다. 회장대행의 요시다도 병으로 인해 2019년 7월 21일 제25회 참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하지 않은 채 은퇴했고, 같은 해에 사망했다.

 

역대회장

경세회 - 헤이세이연구회 역대회장
역대 회장 파벌호칭 기간
1 다케시타 노보루 다케시타파 1987년
2 가네마루 신 1987~1992년
3 오부치 게이조 오부치파 1992~1998년
4 와타누키 다미스케 1998~2000년
5 하시모토 류타로 하시모토파 2000~2004년
- 공석 2004~2005년
6 쓰시마 유지 쓰시마파 2005~2009년
7 누카가 후쿠시로 누카가파 2009~2018년
8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파 2018년~

 

구성원

회장 회장대행 부회장 사무총장 사무국장 최고고문
다케시타 와타누
(竹下 亘)
모테기 도시미츠
(茂木 敏充)
후나다 하지메
(船田元)
노무라 데츠로
(野村 哲郎)
야마구치 다이메이
(山口 泰明)
오츠카 다카시
(大塚 高司)
누카가 후쿠시로
(額賀 福志郎)

중의원 33명, 참의원 21명으로 총 54명의 의원이 소속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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