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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갤러리/정치경제

이시하라 노부테루의 파벌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 이시하라파(石原派)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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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라 노부테루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きんみらいせいじけんきゅうかい)는 자유민주당의 파벌이다. 회장은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 伸晃)이기에 통칭 이시하라파(石原派) 라고 불린다. 1998년 11월 30일, 재정과학연구소(나카소네파(中曽根派)→와타나베파(渡辺派)→旧와타나베파)에서부터 분리 독립한 야마사키 타쿠(山崎 拓) 그룹 37명에 의해 결성되었고, 무투파(武闘派, 무력 투쟁파) 집단으로써 형성되어 있다. 파벌 결성 당초는 헌법 개정에 열심이었으며, 과거에 파벌 멤버 전원에게 개정론과 정책집의 단행본을 출판했다.

야마사키 타쿠

당초는 야마나카 사다노리(山中 貞則)가 야마사키 타쿠의 후견역으로써 재적해있었으나, 야마사키와 가토 고이치(加藤 紘一)가 오부치 게이조(小渕 恵三)에 대항해서 1999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강행 출마했던 것을 계기로 탈당했다. 2000년 6월 25일에 진행된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현직의 통산산업대신(通産産業大臣) 후카야 다카시(深谷 隆司), 전 문부대신(文部大臣) 고스키 다카시(小杉 隆), 전 경제기획청장관(経済企画庁長官) 후나다 하지메(船田 元) 등 각료 경험자가 낙선, 참원의 세력이 9명 줄었다. 한편으로 그 직후에 발생했던 가토의 난(加藤の乱)에서 가토파와 다르게, 일사분란한 결속을 보여 정계 관계자들을 경탄시켰다.

고이즈미(小泉) 내각에서는 야마사키가 당 간사장 및 부총재로써 주류파이 들어갔으나, 2003년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사키 스캔들의 영향으로 낙선했다. 야마사키는 부총재를 사임했으나, 파벌 회장은 계속해났고, 비의원으로 내각총리대신보좌관(内閣総理大臣補佐官)에 임명되었기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시켜 나갔다. 야마사키는 2005년 4월 24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정계에 복귀했다.

고이즈미 정권 아래에서 급격한 세력 확대도 있었다. 타 파벌 출신자와 야당에서 돌아온 조직도 적지 않으나, 결성 이래, 야마사키와 파벌 간부인 야스오카 오키하루(保岡 興治), 세키야 가츠츠구(関谷 勝嗣), 가메이 요시유키(亀井 善之) 등 베테랑 의원의 보살핌이 좋았던 탓에, 타 파벌과 비교해 여전히 통합이 있었다. 하지만 2006년 자민당 총재 선거 즈음부터, 反아베 신조(安倍 晋三) 경향의 야마사키에 대항해, 일부가 아베 지지에 움직이는 등,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시하라 신타로

2007년에는 우정 민영화 반대파 였던 前가메이파(亀井派) 다게다 료타(武田 良太)와 前하시모토파(橋本派) 후루카와 요시히사(古川 禎久)가 입회했다. 더욱이 같은 해 12월에는 前당정조회장(党政調会長)인 이시하라 노부테루가 입회했고, 이는 정계 관계자로부터 경악을 불러왔다. 이는 이시하라 출신인 니혼테레비(日本テレビ) 회장인 우지이에 세이이치로(氏家 齊一郎)가 야마사키와의 사이를 중개했던 것으로 보여졌다. 야마사키가 이시하라를 입회시킨 것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慎太郎)를 친부로 두어 국민적 지명도가 높고, 자금력도 있는 이시하라를 차기 파벌 영수 후보로 두기 위한 것으로, 다케베 쓰토무(武部 勤)나 아마리 아키라(甘利 明) 등 야마사키에게 반발하는 파벌 내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야마사키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키는 목적이 있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시하라 신타로 자신은 야마사키파와는 관계가 없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돌자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야마사키가 측근인 다노세 료타로(田野瀬 良太郎)와 방북했을 때에는 정부 및 여당에서 강한 불만이 표출됐었다. 2008년 5월 파벌 회합에서 임원 인사를 새롭게 뽑았다. 아마리를 회장대리에, 이시하라를 사무종창제, 야마사키의 심복인 기무라 요시오(木村 義雄)를 사무총장대리에, 세키야를 고문에 앉히는 등 파벌을 다잡았다. 같은 해에는 이시하라가 총재 선거에 강행 출마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재 선거에서는 37석에서 16석으로 세력이 격감했다. 회장 야마사키도 재선에 낙선했지만, 파벌의 존속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회장직을 계속해나가기로 했다. 이후 후루카와나 다케다는 파벌을 떠났다. 같은 해 소속 의원의 감소로 인함 재정난으로 파벌 사무소를 폐쇄하고, 활동 거점을 야마사키 개인 사무소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아마리 아키라

2011년 6월에 회장대행의 아마리에 의해 '최고 일본(さいこう日本, 파벌 내 공부회)'이 결성됐다.

2012년에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하라가 다시 강행 출마, 아베 신조와 이시바 시게루(石破 茂)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그 이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마사키가 입후보하지 않고 은퇴하였고, 2012년 12월 20일 야마사키가 파벌 회장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이시하라파로 바뀌게 되었다. 이시하라 회장의 친동생인 이시하라 히로타카도 파벌에 들어왔다. 하지만, 파벌 간부인 아마리와 다나카 가즈노리(田中 和徳), 야마사키파 초기 멤버인 도카이 기사부로(渡海 紀三朗)와 하라다 요시아키(原田 義昭)는 신체제에 반발하여 파벌을 떠나고, 선거 전에는 오카다 히로시(岡田広), 고이즈미 아키오(小泉 昭男) 참의원 의원도 파벌을 떠나 소속 참의원 의원 수가 일시적으로 0명이 되는 등 세력은 약체화됐다.

2012년, 자민당 정권 복귀 후 제2차 아베 내각에서 회장인 이시하라 노부테루가 환경대신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2014년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이시하라는 각료로부터 떨어져, 당 내 각 파 속에서 유일하게 입각자(入閣者) 및 당4역이 제로가 되는 등 이시하라파의 푸대접이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아마리 아키라는 2012년 이후 경제재정정책담당대신에 취임했다.

모리야마 히로시

2015년, 모리야마 히로시(森山 裕)가 농림수산대신에 취임했고, 2016년에는 금전 지원 의혹의 책임으로 사임란 아마리의 후임으로 이시하라 회장이 다시 입각하게 되었다.

2015년, 니카이파(二階派)와의 합류론이 떠올랐었다. 2017년에는 사무총장인 히라사와 가츠에이(平沢勝栄)가 파벌을 나갔다. 한편, 다니가키(谷垣) 그룹의 나카타니 겐(中谷 元)과 오자토 야스히로(小里 泰弘)가 이시하라파 파티에 출석해 다시 한 번 합류론이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제3차 아베 제3차 개조 내각에서는 이사하라가 각료로부터 떨어져 입각자가 제로가 되었으나, 모리야마가 국회 대책 위원장에 취임해 집행부에 들어갔다. 이후, 입각자 제로 및 모리야마가 국회대책위원장로 있는 상황이 제4차 아베 내각, 제4차 아베 개조 내각을 거쳐 2019년 9월 제4차 아베 제2차 개조 내각까지 이어졌다.

9월 14일에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내각관방장관이던 스가 요시히데(菅 義偉)를 지지, 스가가 당선되고, 2020년 9월 16일에 발족된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서는 사무총장인 사카모토 데츠시(坂本 哲志)가 저출산대책 및 지방창생(地方創生)을 담당하는 내각부특명담당대신(内閣府特命担当大臣)으로 첫 입각했다. 모리야마도 국회대책위원장에 재임했다.

 

구성원

회장 회장대리 단장 사무총장 최고고문
이시하라 노부테루
(石原 伸晃)
노다 다케시
(野田 毅)
- 모리야마 히로시
(森山 裕)
야마사키 타쿠
(山崎 拓)

중의원 의원(11명)

<16선> 노다 다케시(野田 毅)

<10선>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 伸晃)

<6선> 모리야마 히로시(森山 裕), 사카모토 데츠시(坂本 哲志)

<4선> 이시하라 히로타카(石原 宏高), 우에노 겐이치로(上野 賢一郎), 도미오카 쓰토무(冨岡 勉)

<3선> 오니키 마코토(鬼木 誠), 가네코 마스오(金子 万寿夫), 다노세 다이도(田野 瀬太道)

<2선> 미야지 다쿠마(宮路 拓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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