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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갤러리/정치경제

니카이 도시히로의 파벌 지수회(志帥会),니카이파(二階派)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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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지공회(志公会)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
지수회(志帥会)
굉지회(宏池会)
수월회(水月会)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


지수회(志帥会,しすいかい)는 1998년 11월 정책과학연구소 파벌 후계를 둘러싼 대립에서 야마자키 타쿠가 이탈하자,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중심으로 하는 잔류 세력이 당시 청화회를 이탈한 가메이 그룹과 통합하게 된 것이 현재의 지수회다. 고이즈미 내각 당시 ‘저항세력’으로 분류되어 고이즈미 개혁을 비판하는 세력이 되었다. 2005년 우정민영화에 반대하여 소속의원들이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니카이 도시히로가 2014년까지 회장을 맡았으나,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하면서 회장 자리는 공석이다.

 

결성

무라카미 마사쿠니

1998년 11월 30일, 정책과학연구소(政策科学研究所)의 야마자키 다쿠(山崎 拓) 그룹이 근미래정치연구소(近未来政治研究会)를 결성하면서 분리독립했다. 파벌의 오너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와 그 그룹은 파벌 내의 노선 대립에 의해 청화회(清和会)로부터 이탈한 가메이 시즈카(亀井 静香) 그룹과 합류하여, 1993년 3월 18일에 지수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旧 와타나베파(渡辺派)로부터 분리독립한 사이, 旧와타나베파 소속의 참의원 의원에 대해서는 당시 참원간사장(参院幹事長)으로 '참의원의 법왕(参議院の法王)'이라 불린 무라카미 마사쿠니(村上 正邦)가 의원들은 집결했기에 야마자키파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적었으나, 중의원 의원은 중견 및 젊은 의원들의 대다수가 야마자키파로 이동하였다. 그로 인해 旧 와타나베파 측은 장로 및 베테랑 의원이 많이 남았고, 가메이 그룹 측은 소속 중의원 의원의 절반 이상이 경험이 부족한 당선 3선 이하의 젊은 의원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함께 영향력이 감소한 소수파벌로써 양 파벌은 의견을 모아, 분리독립한 파벌 동지로써 대등한병을 통해 지수회를 단숨에 중참 60명 규모의 대파벌로 만들었다. 1993년 3월 18일, 초대 회장으로 무라카미가, 회장대행에는 가메이가 취임했다. 

 

에토(江藤) 회장 시대

에토 다카오

1999년 7월, 무라카미가 자민당 참의원 의원회장에 선출되면서 파벌을 나갔기에, 가메이가 후임 회장 후보로 올랐다. 그러나 旧 와타나베파로부터 들어온 야마나카 사다노리(山中 貞則)와 나카야마 마사아키(中山 正暉)와 같은 완고한 의원들이 많고 이 베테랑 의원들을 모을 힘이 없다고 생각한 가메이는 에토 다카미(江藤 隆美)에게 '나는 돈이 없어 맡을 수 없다'라고 말을 하며 회장직을 넌지시 넘기겠다는 말을 전했다. 가메이에 의해 모든 돈을 내었을 만큼 인품이 좋은 에토가 회장직을 받기로 하였고, 제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가메이는 회장대행인 채로 실무를 담당). 2000년 6월 25일에 실시된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중축 멤버들과 대물의원들이 낙선하면서 세력이 크게 감소되었다. 선거 이후 발족한 제2차 모리 내각에서는 가메이가 자유민주당정무조사회장(自由民主党政務調査会長)을 유임하고,다니 요이치(谷 洋一)가 농림수산대신(農林水産大臣)에, 히라누마 다케오(平沼 赳夫)가 통상산업대신(通商産業大臣)에 취임했다. 200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가메이가 입후보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郎)에게 패했다.

파벌 결성 당초부터 당내에서는 수구파(守旧派)였으나, 무라카미 및 고야마 다카오(小山 孝雄)의 KSD 비리 사건 의혹으로 체포되어, 참의원 의원 퇴직을 하면서 2위였던 야나가와 가쿠지(柳川 覚治)가 당선되었다. 2001년 고이즈미 정권 탄생 이후, 에토와 가메이는 개혁파이던 고이즈미가 말하는 '저항세력(抵抗勢力)'의 대표격이 되었고, 선봉에서 고이즈미 개혁을 비판했다.

 

가메이(亀井) 회장 시대

가메이 시즈카

에토의 정계 은퇴 표명을 받아들여, 2003년 10월 10일에 가메이가 3개 회장에 취임했으나, 가메이가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공천 문제를 둘러싸고 파벌의 최고고문이던 나카소네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재에 의해 총선거 불출마, 은퇴를 하게 되었다.

긴 시간 논의되어 오던 고이즈미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우정민영화(郵政民営化)를 가메이와 참원 가메이파 회장의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曽根 弘文) 그룹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가메이의 이러한 자세는 고이즈미 개혁에 동참하는 미즈노 겐이치(水野 賢一) 그룹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메이가 '反고이즈미'의 선두를 서면서, 가메이파를 이탈하는 의원도 있었지만, 가메이는 파벌 탈퇴 의사를 보인 의원들을 붙잡지 않았고, '(가메이의 트레이드마크인)거북이 배지를 달고있으면, 선거에 불리하니깐 거북이 배지를 빼주게'라고 오히려 자신의 파벌의 의원들을 걱정했다. 가메이 외에, 전 중의원 의장이었던 와타누키 다미스케(綿貫 民輔), 전 총무회장이던 호리우치 미츠오(堀内 光雄), 전 우정대신이던 노다 세이코(野田 聖子) 등이 가메이파 이외의 파벌로부터 중원에서의 우정민영화 법안을 반대하는 배신자가 되었으나, 5표 차이로 가결되었다. 하지만, 참의원에서는 나카소네 히로후미 등의 배신으로 인해 법안은 부결되었다. 이로 인해, 고이즈미는 즉각 중의원을 해산했다. 해산 후, 가메이는 지수회 회장을 퇴임하고, 자민당을 탈당했다. 와타누키와 전 국토청장관이던 가메이 히사오키(亀井 久興)들과 함께 국민신당(国民新党)을 창당했다.

그 이후, 일시적으로 전 경제산업대신인 히라누마 다케오가 후임 회장으로 취임했으나, 중의원에서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히라누마도 자민당으로부터 공천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게되면서 회장을 퇴임했다. 이로 인해, 이부키 분메이(伊吹 文明)가 후임 회장에 선출되기 전까지 지수회 회장은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이부키(伊吹) 회장 시대

이부키 분메이

2005년 9월 15일, 우정민영화 법안에 찬성한 회장 대행의 이부키가 파벌의 차기 대표로 내정되었으나, 파벌 내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있어 정식 취임은 늦춰졌다. 12월 14일에 반대하던 시마무라 요시노부(島村 宜伸)를 명예회장에 앉히는 걸로 합의를 보고, 이부키는 정식으로 회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부키 그룹은 가메이파의 이미지를 떨쳐내기 위해, 히라누마가 정한 파벌 명칭 '지수회'를 변경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파벌 내에 반발이 심해 단념하였다.

2007년 3월 15일, 명예회장이던 시마무라가 파벌을 나갔다. 이것은, 가메이의 이탈 이후, 파벌 내에서 주도권 다툼에서 시마무라가 이부키와 대립하던 것과 시마무라가 우정 해산에 반대했던 일로 '자객(刺客)'으로써 선거에서 싸웠던 같은 파벌의 니시카와 교코(西川 京子)와 가기타 츄베에(鍵田 忠兵衛)와의 불화가 생긴 것이 이유라고 알려져있다.

같은 해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부키파는 고가파(古賀派)와 마치무라파(町村派)와 연립하여 아소파를 제외한 8파벌로 후쿠다 야스오(福田 康夫)를 지지하였고, 아소포위망(麻生包囲網)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부키파로부터 아소 타로(麻生 太郎) 총재 옹립 지지자가 5명 나왔다. 이부키파의 소속 의원들 중 아소 지지를 명확이 한 의원은 28명 중 20명이었다. 9월 24일, 이부키는 새로운 총재인 후쿠다 아래에서 간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지수회로부터 간사장 배출은 파벌 창설 이래 처음이었고, 나카소네파, 와타나베파, 旧와타나베파 시대를 포함해 3번째였다. 간사장 취임으로 인해 이부키가 형식적으로 파벌을 나가게 되었고, 나카가와 쇼이치(中川 昭一)가 회장대행에 취임했다.

이부키는 후쿠다 야스오 개조 내각에서는 재무대신에 취임했으나, 1개월을 남기고 후쿠다는 총리직을 사퇴한다. 5명이 입후보한 2008년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이부키파는 간사장 아소 타로의 지지를 파벌단위로 결정한다. 아소의 맹우인 나카가와가 재빠르게 아소 지지를 밝혔고, 9월 4일 이부키파 임원회에서 확정하게 되었다. 아소 내각 발족 이후 이부키를 대신하여 나카가와 쇼이치가 재무대신에 취임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차기 회장 후보였던 나카가와의 그룹이 낙선하여, 파벌 영수가 고전하던 중, 회장이던 이부키도 교토 1구에서 패배하였으나 석패율제로 간신히 당선하게 되었다.

선거 후 참패로 파벌의 세력은 대폭 축소되었고, 더욱이 나카가와가 10월에 급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변화로 2009년 총선거에서 당선자가 회장 니카이 도시히로(二階 俊博) 혼자였던 보수신당(保守新党)이 자민당에 합류하면서 생긴 니카이파(二階派)와 합병을 한 결과, 니카이파의 니카이 도시히로, 이즈미 신야(泉 信也), 쓰루호 요스케(鶴保 庸介) 3명이 이부키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부키는 파벌의 명칭을 변경하기 않았기에 당명의 유지를 주장했다.

2010년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이즈미가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새롭게 2009년 총선거에서 낙선하고 참의원으로 옮겨가 출마한 가타야마 사츠키(片山 さつき)가 파벌에 들어왔다. 2010년 1월에는 후루야 게이지(古屋 圭司)가 의원 그룹인 노조미(のぞみ)에 참가하면서 사실상 이부키파를 떠났고, 8월에는 나카소네 히로후미가 탈파벌을 주장하면서 자민당 참의원 의원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이부키파를 떠났다. 2011년 5월 12일, 무소속의 나카무라 기시로(中村 喜四郎)가 무소속인 채로 특별회원으로 파벌에 가입했으나, 자민당 입당은 보류했다.

 

니카이(二階) 회장 시대

니카이 도시히로

2012년 12월 26일 회장 이부키 분메이가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면서 관례 상 파벌을 나가게 되자, 니카이 도시히로가 후임 회장으로 취임했고, 니카이파가 되었다. 사무총장이던 가와무라 다케오(河村 建夫)가 당사역(党四役) 후임으로 격상되어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하면서 파벌을 나갔다. 사무총장 후임으로는 니시카와 고야(西川 公也)가 맡게 되었다.

2014년 9월 당 임원 인사에서 회장인 니카이가 총무회장에 취임하면서 관례상 파벌을 나갔다. 회장직은 공석이 되었고, 선대위원장을 퇴임한 가와무라가 회장대행에 취임했다. 한편, 대외적인 명칭은 계속해서 니카이파를 유지했다. 12월에 이부키가 중의원 의장을 퇴임하면서 복귀했다. 2016년 8월 니카이가 간사장에 취임하면서 간사장 파벌외 되었고, 니카이는 자민당 총재 임기를 연속 2기 6년에서 연속 3기 9년으로 연장하는 당령 개정을 주도했다.

 

니카이파 확대노선(拡大路線)

니카이는 우정 배신자 복당 문제에서 자민당을 탈당한 의원들과 민주당 등의 다른 당 출신자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파벌로 대려오면서 확대 노선을 가졌다. 무소속 의원을 특별 의원으로써 데려왔고, 자민당 입당 후에 파벌의 정회원으로 만드는 수법을 사용했다.

우정 문제를 둘러싸서는 자민계 무소속의 나가사키 고타로(長崎 幸太郎)가 2013년에, 고이즈미 류지(小泉 龍司)가 2014년에 니카이파 특별회원이 되었고, 2017년 10월에 정회원이 되면서 복당했다. 또, 자민당에서 제명당한 와타누키 다미스케도 니카이파 주도로 복당하게 되었다.

他 당 출신자들은 민주당을 탈당한 야마구치 쓰요시(山口 壮)가 객원회원(客員会員)으로써 2015년 1월에 입당했다. 2016년 여름에 히라노 다츠오(平野 達男) 전 부흥대신이, 2017년 9월에 전 모두의 당(みんなの党) 대표 아사오 게이치로(浅尾 慶一郎)가 각각 자민당에 입당하면서 니카이파에 들어왔다. 2019년 1월, 전 환경대신 호소노 고시(細野 豪志)가 무소속인 채로 특별회원으로 파벌에 들어왔다.

당 내에서 공천 경쟁에도 상관하지 않는 니카이파의 확대노선에 대해 다른 파벌의 일부로부터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니카이는 '자민당이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정도의 아량도 없으면 안된다(自民党が謙虚に受け入れるだけの雅量がなきゃダメだ).', '동료가 모이는 것이야말로, 큰 힘이 된다. 이것이 정치다. 파벌 정치의 어디가 나쁜가.(仲間がそろってこそ、大きな力になる。それが政治だ。派閥政治のどこが悪いのか)'라고 견제했다.

 

정책

나카소네 야스히로, 가메이 시즈카, 니카이 도시히로가 두 번에 걸쳐 결집한 파벌이다. 무라카미 마사쿠니 영향으로 매파적인 색이 있으며, 친미보수적인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나 비둘기파적인 굉지회(宏池会) 등과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국방, 외교, 내정에 있어서는 히라누마 다케오의 영향으로 세이와연 분열 조직의 합류 후 개헌지지파, 대북강경파, 외국인참정권 및 인권옹호법안 반대파가 증가했고, 부락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을 회유하면서, 인권옹호반대를 주장하는 의원 연맹인 '참된 인권 옹호를 생각하는 간담회(真の人権擁護を考える懇談会)'에 참가하는 비율이 높다.

경제에 있어서는 우정민영화 반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진행하는 '성역 없는 구조개혁(聖域なき構造改革)'에 반대하는 의원이 많았다. 특히, 건설업 및 운수업 출신인 가메이는 지금은 범죄인 담합을 정의라고 공언하면서, 적극적인 재정 및 확대정정책을 주장하면서 수구파 이미지에 박차를 가했었다. 하지만, 국토강인화(国土強靭化)를 주장하는 니카이는 우정민영화에는 찬성했었다.

 

역대회장

역대 회장 파벌호칭 기간
1 무라카미 마사쿠니 무라카미 및 가메이파 1999년
2 에토  다카미 에토 및 가메이파 1999~2003년
3 가메이 시즈카 가에미파 2003~2005년
- 히라누마 다케오 旧가메이파 2005년
- 공석 2005년
4 이부키 분메이 이부키파 2005~2007년
- 공석 2007~2008년
4 이부키 분메이 2008~2012년
5 니카이 도시히로 니카이파 2012~2014년
- 공석 2014년~

 

구성원

회장 회장대행 부회장 사무총장 정책위원장 최고고문
공석 중원: 가와무라 다케오
(河村 建夫)
참원: 나카소네 히로후미
(中曽根 弘文)
하야시 모토오
(林 幹雄)
쓰루호 요스케
(鶴保 庸介)
요시가와 다카모리
(吉川 貴盛)
고이즈미 류지
(小泉 龍司)
이부키 분메이
(伊吹 文明)

중의원 40명(무소속 의원 2명), 참의원 11명(무소속 의원 1명)으로 총 51명이 소속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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