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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갤러리/정치경제

아베 신조(安倍 晋三)의 파벌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호소다파(細田派)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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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지공회(志公会)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
지수회(志帥会)
굉지회(宏池会)
수월회(水月会)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


아베 신조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せいわせいさくけんきゅうかい, 청화정책연구회)는 자민당 내에서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나 굉지회(宏池会)와 함께 보수 명문파벌이며, 보수합동 시기의 일본민주당(더 오래 전에는 일본자유당)의 혈통이다. 이전 명칭은 세이와회(清和会, せいわかい, 청화회)이며, 약칭은 세이와연(清和研, せいわけん, 청화연)이다. 통칭 호소다파(細田派)이며, 후쿠다파(福田派)→아베파(安倍派)→미츠즈카파(三塚派)→모리파(森派)→마치무라파(町村派)→호소다파(細田派)로 이어져왔다.
자유민주당의 '반(反)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노선을 기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친미를 기초로 두면서 자주헌법론(自主憲法論) 및 헌법개정론(憲法改正論)을 주장하며, 재무장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비교적 매파적인 색이 강하고, 냉전 시기에는 반공주의를 반영하면서 한국과 대만에 독자적인 인맥을 가졌었다.
기시파(岸派)를 가와시마 쇼지로(川島 正次郎)와 분리한 후쿠다 다케오(福田 赳夫)로부터 이어온 자민당의 유력파벌이었으나, '가쿠후쿠전쟁(角福戦争, 각복전쟁)' 이후, 타 파벌이 다나카파(田中派, 이후 헤이세이연구회)의 지지없이는 내각총리대신 및 자민당 총재가 되는 것이 어렵던 시기(다나카 지배)가 계속되어왔기 때문에, 다나카와 대립 관계이던 후쿠다가 영수로 있는 동안 비주류파였던 적이 많았다.
후쿠다로부터 파벌을 승계한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는 간사장으로 다케시타 정권을 지지했으나, 총재의 자리를 눈 앞에 두고 병으로 쓰러졌다. 1993년 경세회(経世会) 분열 이후에 미츠즈카 히로시(三塚 博)와 모리 요시로(森 喜朗)와 같은 실력자들이 집행부로 들어와 주류파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베의 사망 후 파벌 내의 내분을 견디지 못하는 시기도 있었다. 모리 내각에 의해 후쿠다 이후 오랜만에 총재 파벌이 되었지만, 모리는 오부치(小渕) 내각을 승계하고,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의 색이 짙었었다. 세이와회가 총재파벌 및 주류파로써 실직적으로 정권의 중추를 담당하게 된것은 고이즈미(小泉) 내각 이후이다.

그랜드프린스호텔(グランドプリンスホテル) 아카사카(赤坂)점의 구관 은에서 사무국을 설치하고, 공 호텔에서 매년 1회 봄에 정치자금 파티를 개최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호텔의 영업종료로 인해 2011년 2월, 기오이쵸(紀尾井町)로 이전했다.

 

후쿠다파(福田派)

후쿠다 다케오

십일회(十日会,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파)의 분열 후, 후쿠다 다케오를 중심으로 1962년에 결성된 당풍쇄신연맹(党風刷新連盟, 결성 초기에는 당풍쇄신간담회)이 기원이다. 1970년 11월에 당시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에게 권유를 받아 기오이회(紀尾井会), 통칭 후쿠다파가 파벌로써 정식으로 탄생했다.
1972년까지 7년 동안 사토 내각의 후계를 둘러싼 '포스트 사토'의 다툼에서 내심 사토가 후임으로 후쿠다를 생각했었으나, 정권 말기에 다나카의 맹추격을 받고 결국 총재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 좌절을 계기로, 영수 후쿠다의 밑에서 목요클럽(다나카파)과 '가쿠후쿠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나, 후쿠다가 파벌해소론자였고, 반드시 파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여서 결국 제자리걸음이었고, 1976년에 염원하던 후쿠다 다케오 정권 탄생에 간신히 도달하였으나, 2년 후에 오히라(大平) 및 다나카 연합 앞에서 총재 선거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1972년, 총재 선거에 패배한 직후 슈잔그룹(周山クラブ, 호리(保利) 그룹)과 춘추회(春秋会, 소노다파(園田派))를 결합하여 팔일회(八日会)로 명칭을 변경, 1976년말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발족으로 파벌 해소를 제창, 솔선하여 팔일회를 해산했으나, 후쿠다 퇴진 후에 재결성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1979년 1월에 청화회(세이와회, 清和会)를 결성하게 되었다. 
명칭의 유래는 동진(東晉)의 원제(元帝)가 조서에 제갈회(諸葛恢)의 통치를 '정청인화(政清人和, 청렴한 정치로 백성을 평온하게 한다)'라고 칭찬한 고사에서 따왔다. 이 세이와회는 약칭이 아니라 정식명칭이다. 1984년에는 자유혁신동우회(自由革新同友会, 이시하라파와 구 나카가와파)를 흡수헸다.


아베파(安倍派)

아베 신타로

아베 신타로가 회장으로 있을 때, 파벌 내의 미츠즈카 히로시, 가토 무츠키(加藤 六月), 시오카와 마사쥬로(塩川 正十郎)와 모리 요시로 4명의 실력자들을 일컬어 아베파 사천왕이라 불렀고, 자주 다케시타파 칠봉회(七奉行)와 비교되었다. 아베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의 후계로 지목받은 다케시타 내각에서 간사장이 되면서 주류파가 되었고, 포스트 다케시타로 가장 유력해 보였으나, 리크루트 사건의 이후 충격으로 병으로 쓰러졌다. 그 이후, 아베의 후계 회장을 미츠즈카와 가토가 다투게 되었고(이 항쟁은 양자의 이름을 따 '삼육전쟁(三六戦争)'이라고 불림), 모리의 지지를 받은 미츠즈카가 1991년 6월, 세이와회 회장에 취임한다.
같은 해, 미츠즈카는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가토가 이에 반대하여 다케시타파의 추천을 받고 있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 喜一) 지지를 표명했다. 이로 인해 가토는 같은 해 10월에 미츠즈카파에서 제명당하고, 정진회(政眞会)를 결성하고 자민당도 탈당하게 되었다. 가토의 탈당 후, 미츠즈카를 지지한 모리, 시오카와, 고이즈미, 다마자와 도쿠이치로(玉澤 徳一郎)와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 秀直) 등과, 세이와회에 남은 가토 지지자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 히라누마 다케오(平沼 赳夫),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오미 고지(尾身 幸次),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 信孝) 등, 서로간에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미츠즈카파(三塚派)

미츠즈카 히로시

미츠즈카파가 된 후부터 모리그룹과 급속도로 파벌 내에서 발언력을 늘린 가메이 그룹과의 대립이 격렬해져갔다. 1994년 11월, 자민당이 야당이 되면서 당 내에서 호소되어진 파벌해소로 인해 세이와회는 해산하고, 파벌을 대신해 결성이 인정된 정책집단으로써의 21세기를 생각하는 회(21世紀を考える会) 및 신정책연구회(新政策研究会)를 결성했다. 미츠즈카는 이 정책집단의 회장으로 그대로 유임했다. 1998년 모리 그룹 주도로, 미츠즈카파의 독자후보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郎)를 자민당 총재로 선거 출마를 결정하기로 한 가메이 그룹은 미츠즈카파를 이탈했다. 그 이후 12월에 모리가 미츠즈카로부터 파벌을 승계했다.


모리파(森派)

모리 요시로

모리 요시로가 미츠즈카의 후계 회장이 된 1998년 말에, 일찍이 세이와회에 연관지어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로 개칭하였다. 2000년에 모리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후쿠다 이후 총재 파벌이 되었다. 모리는 파벌을 일시적으로 나갔었기 때문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2000년 4월부터 세이와정책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모리 내각을 지원했다. 파벌을 승계한 모리는 발언력을 늘려가던 고이즈미와 함께 혼란스럽던 파벌을 장악했다.
하지만, 모리 내각은 기본적으로는 오부치(小渕) 전 정권을 승계했고, 노나카 히로무(野中 広務), 무라카미 마사쿠미(村上 正邦), 아오키 미키오(青木幹雄)와 같이 전 내각을 지원했던 타 파벌의 실력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편, 고이즈미가 회장을 맡게된 기간도 호칭은 모리파 그대로였다.
모리의 퇴진 후에 고이즈미가 총리에 취임, 모리는 파벌 회장으로 복귀했다. 고이즈미는 최대파벌이던 하시모토파(橋本派)를 '저항세력'으로 지명, 미키(三木) 내각 이후 25년만에 집행부로부터 제외한 한 편, 아오키 미키오가 실력자로 있던 하시모토파의 참의원측의 협력을 얻어 최대 파벌을 견제 및 분단했다. 그 결과,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 내 제1파벌로 진출, '세이와회지배(清和会支配)'가 펼쳐졌다.
2006년 고이즈미 총재 퇴임으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유력 후보로 모리파 내의 아베 신조(安倍 晋三)와 후쿠다 야스오(福田 康夫)가 떠올랐다. 모리파는 일찍이 아베와 후쿠다의 부친이 이끌었던 파벌이었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고, 2명이 입후보한다면 모리파의 분열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후쿠다가 불출마를 선었하면 파벌 분열의 위기를 피하게 되었고, 9월에 아베가 총재에 선출되었다.


마치무라파(町村派)

마치무라 노부나카

2006년 10월 19일, 모리는 파벌 회장을 퇴임하고, 마치무라 노부나카(町村 信孝)가 파벌 회장에 취임했고, 파벌명은 '마치무라파(町村派)'로 바뀌게되었다. 10월 26일 파벌 총회에서 모리는 파벌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마치무라에게로의 파벌 승계는 간사장에 취임했던 실력자 나카가와 히데나오와의 밸런스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향력과 행동으로 인해 영수로부터 물러난 후에도 모리가 사실상 파벌의 오너였다.
같은 해 9월,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총재가 되고, 모리, 고이즈미, 아베, 후쿠다 4대 연속으로 총리총재를 배출했다. 마치무라가 후쿠다 야스오 내각의 관방장관에 취임하면서 파벌회장직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대표간사역을 두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표간사역에 마치무라, 나카가와, 다니가와 슈젠(谷川 秀善) 3명이 오르면서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 관방장관이란 요직에서의 입각에 의해 파벌 업무에 비중을 두지 못한 마치무라와, 당간사장에 취임하여 파벌에 복귀한 나카가와의 파벌 내에서의 대우를 고려한 결과의 조치였다.
2007년 7월에 이루어진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의 결과 자민당은 패배했지만, 마치무라파는 참의원에서도 쓰시마파(津島派)를 꺾고, 중참 양원에서 당내 최대 파벌이 됐다. 수가 줄어든 타 파벌을 배려해서 무파벌 의원들에게 파벌을 권유하는 것은 타 파벌이 권유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행해졌다.
2008년 3월, 총리총재 취임 이후 파벌을 빠져나온 아베 신조가 '상담역(相談役)'으로 복귀했다. 아베 복귀 전부터 상담역에는 에토 세시로(衛藤 征士郎) 등이 있었다. 한 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총리 퇴임 후 무파벌인 채로 지내다가 2009년에 정계를 떠났다.
2008년 9월, 후쿠다 총재 퇴임에 따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마치무라도 유력한 총재 후보였지만, 아베와 후쿠다 2대에 이어 정권 운영에 실패한것 때문에 모리, 아베, 마치무라는 아베 및 후쿠다 정권을 지원해준 아소 다로(麻生 太郎)를 지지하고, 세이와회로부터 총재 후보를 옹립하지 않는 방침을 내세웠다. 나카가와가 이 방침에 반대하여 고이케 유리코(小池 百合子)를 지지하면서 파벌 내 분열이 표면화되었다. 아소 내각 발족에 따라 간사장 후임에 호소다 히로유키(細田 博之)가 취임했다. 마치무라는 관방장관을 그만뒀지만, 집단지도체제를 변경하지는 않았다.

2009년 1월에 들어, 2011년부터의 소비세증세를 목표로 한 아소 정권에 대항해, 나카가와는 "이 순간에 판단한다(その瞬間に判断する)"라고 말하는 등 본회의에서 반대, 저항하면서 일시적으로 결렬의 양상을 보였다. 결국 세제조사회(税制調査会) 간부이기도 한 마치무라가 증세 실시 시기를 명기하지 않은 형태로 나카가와와 타협안을 작성해 대립은 끝났으나, 정권에 반항한 움직임은 모리, 아베 등의 화를 사게되었고, 나카가와를 대표간사역으로부터 제외하자는 의견이 나타나게 되었다.

2009년 2월 5일 파벌 총회에서 모리가 제안한 인사안은 마치무라를 회장으로 승격하고, 나카가와와 다니가와를 대표간사역으로 중임시키는 것이 되었다. 중견 의원 및 젊은 의원의 일부로부터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인사안은 받아들여졌고, 마치무라가 회장에 복귀하는 것으로 되었다. 같은 해 3월 5일 총회에서 모리가 최고고문으로 아베와 같은 상담역에 취임하는 것이 결정되고, 마치무라 회장 신체제가 굳혀졌다. 

2009년 8월 30일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 따라 중의원에 의한 세력은 공시 전 3분의 1로 감소했고, 고가파(古賀派)에 이어 제2위에 후퇴했지만, 참의원과 합쳐 전체적인 최대파벌의 자리는 지켰다. 9월 3일, 전 방위대신 고이케 유리코가 "파벌단위가 아닌, 당 전체적으로 결집해야만 한다(派閥単位ではなく、党まるごとで一致団結すべき)"고 말하며 파벌을 나갔다.

2009년 9월에 발족한 다니가키(谷垣) 신(新)집행부에서는 총재 및 당간부 후임에서 제외되었다. 마치무라파가 당집행부 후임에 취임하지 못 한 것은 후쿠다파 시대였던 1979년 오히라 정권 이후 30년만이었다. 같은 해 10월, 마치무라의 의향으로 대표간사역이 폐지되었다. 동월 말, 대표간사역 폐지로 인해 파벌 내 사실상 실각한 나카가와 히데나오가 파벌을 나갔다.
2010년 8월 12일 자민당 참의원 의원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모리  요시로가 선창으로 마치무라파, 누카가파(額賀派), 고가파는 다니가와 슌젠 참원 간사장을 밀었따. 하지만 마치무라파의 아베 신조, 세코 히로시게(世耕 弘成) 등 중견 의원 및 젊은 의원들이 "파벌로써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다(派閥で動くのは良くない)"라고 반대하고, 이부키파(伊吹派)의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曽根 弘文)를 추천했다. 선거 결과, 나카소네가 참원 의원회장에 취임했다.

마치무라파에서는 9월 2일에 간부회를 열어, 반대 의원들의 처분을 검토했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고, 모리는 다니카와의 표굳히기로 실패했던 스즈키 세이지(鈴木政二)를 질책하고, 아베에 대한 불만을 내비치면서, "누카가파와 고가파와 마주칠 면목이 없다(額賀派や古賀派に合わせる顔がない)",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다(もう面倒見切れない)"라 말하며 파벌 탈퇴서를 제출했다. 12월 11일, 회장 마치무라가 정식으로 이 탈퇴서를 수리했다.

2012년 9월 총재 선거에 의해 회장 마치무라가 출마를 표명했다. 복귀 후 파벌 내에 영향력을 가진 아베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베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이 출마하면서 분열 선거에 빠져 들었다. 파벌 내에서는 마치무라 지지가 70%정도로 우세했고, 아베는 타 파벌과 무파벌 의원의 지원을 얻어 선거전에서 싸웠다. 선거전이 한 창일 때, 마치무라는 건강 악화로 활동을 중지했지만, 투표일까지 입후보를 취소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입후보를 취소했을 경우, 자신에게의 표가 그대로 아베에게 흘러갈 것은 경계한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투표에서 아베가 당선, 다시 한 번 총재 자리에 올랐다.

제46회 중의원 총선거 결과, 자민당이 정권을 탈환, 아베가 내각총리대신에 다시 한 번 취임했다. 23회 참의원 통상선거 결과, 자민당이 참의원 제1당에 돌아왔고, 자공연립(自公連立,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이 참의원 과반수를 확보하였고, 파벌 소속의  야8마자키 마사아키(山崎 正昭)가 참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호소다파(細田派)

호소다 히로유키

제47회 중의원 총선거 후, 회장 마치무라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이로 인해, 입법부와 행정부 장을 마치무라파 출신 의원이 독점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관례에 의해 마치무라가 파벌을 나갔기때문에, 호소다 히로유키(細田 博之)가 후임 회장에 취임하고, 호소다파가 되었다. 마치무라는 병으로 의장을 퇴임한 후에 사망했기 때문에, 호소다가 그대로 회장에 남게 되었다.

제24회 참의언 통상선거 후, 파벌 소속의 다테 츄이치(伊達 忠一)가 참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아베 퇴임 표명에 의해 2020년 총재선거에서 잠시 시모무라 하쿠분(下村 博文)과 이나다 도모미(稲田 朋美),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 康稔)가 의욕을 보였으나, 최종적으로는 파벌로써 스가 요시히데를 지지했다. 스가 정권에서는 시모무라가 정조회장(政調会長, 정책조사회 회장)으로 집행부에 들어갔다.

 

역대회장

역대 회장 파벌호칭 기간
제1대 후쿠다 다케오 후쿠다파 1979~1986
제2대 아베 신타로 아베파 1986~1991
제3대 미츠즈가 히로시 미츠즈카파 1991~1998
제4대 모리 요시히로 모리파 1998~2000
제5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0~2001
제6대 모리 요시히로 2001~2006
제7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마치무라파 2006~2007
- 마치무라 노부타카
나카가와 히데나오
다니가와 슌젠
2007~2009
제8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2009~2014
제9대 호소다 히로유키 호소다파 2014~

 

구성원

임원

회장 회장대리 부회장 단장 참의원 의원회 회장 사무총장 사무국장 정책위원장 최고고문
호소다 히로유키
(細田 博之)
시오노야 류
(塩谷 立)
시모무라 하구분
(下村 博文)
하세 히로시
(馳 浩)
다카기 츠요시
(高木 毅)
마츠노 히로카즈
(松野 博一)
요시노 마사요시
(吉野 正芳)
나카가와 마사하루
(中川 雅治)
야마모토 쥰조
(山本 順三)
야마타니 에리코
(山谷 えり子)
세코 히로시게
(世耕 弘成)
마츠노 히로카즈 다카기 츠요시 스즈키 쥰지
(鈴木 淳司)
에도 세이시로
(衛藤 征士郎)
야마모토 마사아키
(山崎 正昭)

중의원 62명, 참의원 36명으로 총 9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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