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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갤러리/정치경제

기시다 후미오의 파벌 굉지회(宏池会), 기시다파(岸田派)에 대해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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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의 파벌 굉지회(宏池会), 기시다파(岸田派)에 대해서①

고이즈미 정권

호리우치 미츠오

5년 반의 장기 정권이었던 고이즈미 정권에 있어서는 타니가키파는 타니가키 자신이 거의 일관해서 주요 각료를 담당했기때문에 사실상 주류파로써 정권을 유지하는 한 편, 호리우치파는 정권에서 거리가 멀었고, 2003년 총재 선거 등에서 파벌 내 대립이 격화됐다.
2005년은 이른 바 우정(郵政)법안과 그 후의 우정 해산을 둘러싸면서, 호리우치 회장이 반대표를 던지면서 탈당으로 발을 돌렸고, 고가도 기권표를 던지면서 서약서을 쓰게 된 상황에서 겨우 공인을 얻는 등 쓴 맛을 보게 되었다.
고이즈미의 '탈파벌(脱派閥)' 방침으로 인해 파벌이 약해지던 시기였지만, 상대적으로 고이즈미의 출신 파벌인 세이와회(清和会)의 존재감은 커져만 갔고, 그에 대한 대항의 의미로 굉지회의 재결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굉지회 결집 구상

니와 유야

2006년에 들어, 고노 그룹도 포함해 旧 미야자와파의 혈통을 잇는 3개 파의 재결집을 목표로 한 대(大)굉지회 구상이 구체적으로 표면화되었다. 타니가키와 고노 그룹 소속의 아소 타로가 자신이 포스트 고이즈미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2006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가 끝나고 난 후 10월 즈음에 3개 파 간부들의 의견은 일치하고 있었고, '대굉지회'로의 흐름은 가속되는 것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총재 후보가 없던 니와(丹羽) 및 고가파 내부에서는 젊은 의원을 중심으로 아베 대망론이 뿌리 깊게 만연했고, 니와 유야(丹羽 雄哉)와 고가 마고토(古賀 誠)도 사실상 아베 지지를 표명하였고, 더욱이 니와 및 고가파의 베테랑이던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 伯夫)가 아베 진영의 선대본부장으로 취임(후에 후생노동대신)했다.
아베가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후, 인사에서 니와 및 고가파에서 니와가 총무회장에 취임했던 것을 더불어, 4명을 각료로 보내고, 고노 그룹(2006년 이후 아소파)에서도 아소 외무장관이 유임하는 등 주류파가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타니가키파는 완전히 요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더욱이 총재 선거 후에 니와 및 고가파의 고가 계의 의원에 의해 니와 제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2007년, 아베 퇴진 후의 총재 선거에서는 총재 선거 과정에서 빠르게 타니가키 및 고가가 파벌로써 후쿠다 야스오(福田 康夫)를 지지하고, 대립 후보인 아소를 일전에 열세에 빠지게 만드는 '아소 포위망'을 만들었다. 후쿠다 정권에서는 고가 및 타니가키 자신들이 주요 3역에 들어가는 한 편, 아소는 입각(入閣)을 거부한 반주류파로 돌아갔다. 원래 절친한 사이였던 아소와 고가의 관계가 차가워진 것도 이 시기이다.  이렇듯 3파의 관계와 각 파벌 내부에서 골이 생겨났기 때문에, 총재 선거가 지난 다음에는 대굉지회로써의 합류는 곤란하게 된 정세였다.


고가파(古賀派)와 타니가키파(谷垣派)의 재합류

고가 마코토

한편, 상술한 총재 선거를 계기로 타니가키파와 고가파의 관계는 긴밀해졌고, 2007년 말에는 아소파를 제외한 '중굉지회(中宏池会)'로써 고가파와 타니가키파가 2008년 5월에 재합류하는 것으로 양 파벌이 합의했다. 이것이 동반하여 '굉지회'란 명칭으로 2개의 파벌이 양립하는 상황은 7년만에 수습되었다.

그 이후, 재합류는 기존에 통상국회 전이 희망되는 관점보다 앞당겨진 2008년 5월 13일이 되었고, 고가가 파벌 회장에, 타니가키가 대표간사(代表世話人)에, 아이사와 이치로(逢沢 一郎)가 사무총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중굉지회의 성립으로 굉지회(2008년 10월 15일 기준 61명)는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2008년 6월 20일 기준 89명),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 2008년 2월 13일 기준 69명)에 이어 제3파벌이 되었고, 비둘기파 세력으로 당내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였다.

 

총재 파벌로

타니가키 사다카즈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했던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굉지회는 소속 중의원을 25명으로 반으로 감소했지만, 제1파벌인 세이와회(清和会), 제2파벌인 헤이세이연(平成研)의 의석수가 각각 1/3으로 줄었기때문에, 중의원에서는 제1파벌이 되었다.
아소 총재 퇴임을 맞은 2009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타니가키 사다카즈(谷垣 禎一)가 승리했다. 자신의 파벌을 포함해 폭 넓은 지지를 모은 압승이으로 보였지만, 오노데라 이츠노리(小野寺 五典)가 스스로 입후보를 모색한 상황에서 고노 타로(河野 太郎)를 지지하는 상황으로 바꾸었고, 스가 요시히데(菅 義偉)도 파벌을 떠나면서 고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총재 선거는 파벌 단위의 움직임 보다는 세대 대립의 양상을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굉지회가 이전 야당 전락 시기의 고노 요헤이(河野 洋平) 이후 14년만에 총재 파벌로 돌아왔지만, 취임 후에 곧 탈당자가 잇따르는 등 어려운 당의 운영이 이어졌다.

 

고가파에서 기디사파(岸田派)로

기시다 후미오

하지만 다음 해 제22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을 과반수 이하로 떨어뜨리고, 각종 지방선거와 2011년 통일 지방선거 등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총재로써의 타니가키는 좋은 평가를 얻고 있었다. 총재 재선을 목표로 201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에 의욕을 보인 타니가키는 출신 파벌의 영수인 고가에 지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고가는 "젋은 사람에게 바톤터치를 해야만 한다(若い人へバトンタッチするべき)"라고 말하며, 타니가키 지지를 거부했다. 파벌 내의 旧 타니가키파 의원들의 반발이 있던 중 고가는 참의원 의원의 하야시 요시마사(林 芳正)를 옹립했다. 출신 파벌의 지지를 얻지 못한 타니가키는 탈파벌을 내세우며, 당내 최대 세력인 무파벌 의원의 지지를 얻을려고 했으나, 추천인의 확보가 어렵게 되자, 돌연 간사장인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 伸晃)가 입후보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집행부 내의 후보단일화를 이유로 최후는 입후보 포기를 하였다. 이러한 차기 총재 선거에 자민당의 정권 탈환이 확실시되던 중, 주요 측근이사에 대한 영향이 있던 타니가키가 총리 자리를 눈 앞에 두고 놓치게 되는 전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시 굉지회 출신의 총재였던 고노 요헤이의 케이스와 매우 닮아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벌 내에서는 대립이 격화되었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 고가는 회장직 퇴임을 표명했다. 후임으로 타니가키 측근인 아이사와 이치로(逢沢 一郎)를 내세우면서 파벌 내의 융화를 꾀하려고 했으나, 타니가키계의 반발을 해결하지 않아 아이사와와 가와사키 지로(川崎 二郎) 등 약 10명의 旧 타니가키 파 출신 의원들이 탈당표를 제출했다. 아이사와계는 총재 퇴임 후에 굉지회에 복귀를 보류한 타니가키와 타니가키의 재선을 지지한 의원들과 함께 '유린회(有隣会)'를 발족하고, 굉지회는 다시 한 번 분열되게 되었다.

결국, 신회장에는 고가계에 가까운 기시다 후미오(岸田 文雄, 전 오키나와 및 북방 대책담당상)이 취임하고, 넘버2인 단장에는 하야시 요시마사가, 명예회장에는 고가가 맡게 되면서, 이후 매스미디어 등에서는 기시다파(岸田派)라고 불리게 되었다. 총재 선거에서의 지지 후보 패배와 파벌의 분열로 구심력이 크게 저하된 고가는 제46회 중의원 총선거에 입후보하지 않은 채 정계를 은퇴했다.

총재선거 이후 탄생한 제2차 아베 내각에서는 기시다(외무대신), 하야시(농림수산대신), 오노데라 이츠노리(바우이대신), 네무토 다쿠미(부흥대신), 총 4명이 입각했다.

2014년 9월 3일에 발족한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하야시, 오노데라, 네무토가 입각하지 못했고, 기시다는 유임, 시오자키 야스히사(塩崎 恭久)가 후생노동대신에, 사무총장인 모치즈키 요시오(望月 義夫)가 환경대신으로 새롭게 입각했다. 후임의 사무총장에 미야코시 미츠히로(宮腰 光寛)가 취임했다. 이후 퇴임한 각료의 후임으로 가미카와 요코(上川 陽子), 미야자와 요이치(宮澤 洋一), 하야시가 각각 법무대신, 경제산업대신, 농림수산대신으로 입각했고, 합계 6명이었다.

이후 시오자키가 퇴회하였고, 2015년 10워렝 발족한 제3차 아베 제1차 개조 내각에서는 기시다만이 유임하여 1명만이 입각했다.

2016년은 '가토의 난(加藤の乱)' 전후 파벌 장이었던 호리우치 미츠오(堀内 光雄), 가토 고이치, 오자토 사다토시가 연달아 사망했다. 

2017년 8월 3일에 발족한 제3차 아베 제3차 개조 내각에서는 가미카와가 법무대신, 오노데라가 방위대신으로 재임, 하야시가 문부과학대신, 마츠야마 마사지(松山 政司)가 내각부특명담당대신으로 4명이 입각했다. 기시다는 당의 정무조사회장으로 취임했다.

2019년 7월 21일, 제25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미조테 겐세이(溝手 顕正), 나카이즈미 마츠지(中泉 松司), 오누마 미즈호(大沼 瑞穂), 니노유 다케시(二之湯 武史)가 낙선했다. 
2020년 9월 1일과 14일에 이루어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 기시다가 입후보를 표명했지만, 결과는 내각관방장관의 스가 요시히데에게 밀려 2위로 패배했다.

 

여담

참의원인 다나카 나오키(田中 直紀, 참2선, 중3선)는 고가파를 지나 중굉지회결성(2008년 5월 13일)에도 참가했지만, 무소속으로 민주당회파의 중의원이던 다나카 마키코(田中 真紀子)의 남편이라는 입장도 있었기 때문에, 2008년 9월 26일 '고향 사정'을 이유로 자유민주당에 탈당서를 제출했다. 탈당서가 간사장인 호소다 히로유키(細田 博之)가 맡아 둔 이후, 10월 15일에 당 본부에서 정식으로 탈당을 수리하고, 다나카 나오키는 무소속이 되었고, 2009년 8월에 아내인 다나카 마키코와 함께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것은 부인으로 부터 선거 응원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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