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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갤러리/경제학사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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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항상 어떻게 하면 사회질서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인간의 동감 능력에서 사회질서유지의 근거를 찾았는데, 도덕감정론에서 그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지만 남에게 동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으며, 이 때문에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도덕감정의 원천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도덕감정의 힘만으로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봤다. 때문에 그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 잘 규정되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가 성장해서 자립적인 사람들이 많아야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국부를 증대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국부론인 것이다.

이렇게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그리고 그의 철학과 다른 저서를 함께 놓고 국부론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지금껏 알아왔던 국부론과는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국부론에 대한 몇 가지 통념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국부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 통념 하나는, 애덤 스미스는 노동자보다는 자본가를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자본의 축적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데, 하지만, 스미스에게 자본은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노동자를 도와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즉,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독일 경제학자 칼 맹거는 애덤 스미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스미스는 모든 경우에 부자와 강자, 빈자와 약자 간 이해 다툼에 그 자신을 ‘예외 없이’ 후자 편에 위치시킨다. 애덤 스미스의 저작에서는 빈자와 약자에 대항해서 부자와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하나의 사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애덤 스미스를 생각한다면, 이 평가는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스미스 당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에는 경제적 약자를 옥죄는 3가지 악법이 있었다. 바로 노동조합법, 도제법, 거주법인데, 노동조합은 길드 조합원이 되는 자격을 엄격히 규제하면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했다. 도제법은 최저 7년간 장인 밑에서 일해야만 비로소 독립하여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법이다. 거주법은 빈민이 신고하지 않고 거주지를 변경했을 경우 40일 이내에 강제 송환이 가능하게 하는 법이다.

이에 대해 스미스는 “국민들 모두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어떠한 직업에도 종사할 수 있는 자연적 자유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 즉, 자연적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노동조합의 배타적 특권을 타파하고, 도제법을 폐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거주법을 폐지함으로써 가난한 노동자가 어느 직업이나 어느 장소에서 실직하더라도, 고발당하거나 이전을 강요당할 근심 없이, 다른 직업을 얻거나 다른 장소에서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가 잘 사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이며, 나라가 부유해지면 당연히 노동자도 부유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반적으로 노동임금이 상승하는 현상은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반증이라며, 이를 불평하는 것은 그 나라의 최대 번영의 필연적 인과관계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두 번째는 애덤 스미스가 이기심을 옹호하고 윤리와 도덕 문제는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대학에서 주로 강의했던 것이 도덕철학이라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윤리와 도덕 문제를 중요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위치인데, 스미스가 쓴 도덕감정론을 보면, 이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일단, 그는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selfish)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천성(nature)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칙들이 존재한다. 이 원칙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동감본성 때문에 이타적이라고 본 것이다. 때문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성을 중요시했다. 

국부론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는 이기심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정책인 중상주의는 이웃나라를 가난하게 하는 이기심에 기반했기 때문에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인류 지배자들의 이기심에 대해 비판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해서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세계의 어떤 시대에서나 인류 지배자의 비열한 좌우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왜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을 옹호한 경제학자로 알려졌을까? 많은 오해는, 국부론의 이 구절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이기심(their own interest)에 대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스미스는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이기적(selfish)이라는 말과 자기 이익추구(self-interest)란 말을 구분해서 사용했지만, 많은 책들이 자기이익 추구(self-interest)를 이기적(selfish)으로 번역한 탓에, 스미스를 오해하게 만든 것이다.

세 번째는 흔히들,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방임주의를 자연적 자유주의와 혼동해서 벌어진 일이다. 국부론에서는 자연적 자유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특혜나 억제의 체계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명백하고 단순한 자연적 자유의 체계가 저절로 확립된다. 누구든지 정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노동과 자본을 다른 어떤 사람 또는 어떤 계층의 사람들의 노동과 자본과 경쟁시킬 수 있도록 완전한 자유에 맡겨진다. 여기에는 독점체계 철폐, 법 안에서 경제활동이라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전제 조건은 무시하고 “완전한 자유에 맡겨진다”만 강조하니,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로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스미스는 “만일 어떠한 나라가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정의를 누리지 않으면 번영할 수 없었다면, 일찍이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렸을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라고 말하며 자유방임주의를 반대했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경제적 자유는 동업조합이 폐지되기 시작하면서 사기업의 자유로운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고, 주종법이 개정되면서 노사 양자 간 계약위반에 대한 평등한 처리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네 번째는 현대 경제학은 스미스의 사상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국부론은 경제에 도입한 신고저파 경제학과는 달리 정치경제학에 대해 논의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정치경제학은 정치가나 입법자의 학문의 한 분야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국민에게 풍부한 수입이나 생계 수단을 제공하는 것과 공공서비스를 공급하는데 충분한 수입을 국가에 제공하는 것이다. 즉, 정치경제학은 국민과 국가를 모두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스미스는 국민과 국가를 동시에 부유하게 하는 것이 정치경제학의 목적이라 했다. 하지만,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창시한 알프레드 마샬은 “경제학은 과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와 떠나서 생각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가격이론을 가지고 두 입장을 한 번 살펴보면,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는 수요곡선은 주어진 돈 안에서 각 개인이 효용을 최대화한다고 가정한다. 여기에 완전경쟁이라는 가정이 추가된다. 반대로 공급곡선은 주어진 비용을 갖고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리고 이 두 곡선이 만나는 점에서 가격, 그러니까 균형가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속에는 인간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계산할 줄 안다는 것이다. 반면, 스미스의 가격이론은 이와 다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결정되는 평균수준의 임금, 이윤, 지대를 합친 것을 자연가격이라고 지칭했다. 또, 시장가격은 공급과 유효수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격이라고 봤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스미스가 설명한 자연가격을 자신들의 균형이론에 따라 균형가격으로 재해석했다. 일반인들이 신고전경제학을 스미스 경제학으로 오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실 스미스가 강조한 인간의 동감본성은 마샬 같은 학자가 경제학을 과학으로 만들려는 노력에 큰 장애물이었다. 타인의 인정과 동감으로부터 얻는 기쁨을 효용함수에 포함시키면 신고전경제학에서 목표로 하는 수량화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이런 가정 위에 이론을 세우고 축적했다.

국부론을 언급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이 주제도 아니고, 이 말도 애덤 스미스가 만든 용어도 아니다. 단지, 이전의 영국 문학에서 사용되던 비유적 표현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것이다. 천문학의 역사와 도덕감정론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은 각각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는 ‘신의 섭리’로 해석이 된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애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덕감정론에는 바로 시계 이야기가 나온다. 시계가 시간을 제 때 알려 주는 것은 시계제조업자의 제작 의도 혹은 목적이고, 시계내부에 작용하고 있는 톱니바퀴의 움직임은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자연의 현상을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신의 의도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보이지 않는 손이 왜곡돼 받아 들여졌던 걸까? 앞서 설명했듯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자신들의 학파의 원류쯤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됐는데, 대표적인 학자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사무엘슨 교수이다. 그는 그의 저서 ‘경제학’에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정부 간섭을 줄이고 시장을 자유롭게 하라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런가하면, 사무엘슨처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우는 경쟁적인 시장에서 작동하는 합리적 인간의 이기심이 경제를 최적상태로 이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도출한 수학적 결론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체계화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사무엘슨이나 애로우는 스미스가 정부간섭에 반대한 것은 사회에서 경제적 강자인 상공업자의 횡포(독점)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정부와 상인과 제조업자가 한 통속이기 때문에 정부가 간섭하지 말라고 강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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