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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갤러리/정치경제

[일본경제론] 패전 이후 일본의 경제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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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이하 GHQ; General Headquarters)가 점령하던 7년은 오히려 일본경제가 후퇴기에서 부흥기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패전 이후 600만명 정도의 일본인이 식민지로부터 돌아오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전쟁동안 주식인 쌀의 생산량이 절반 가량 줄어든 일본은 미국의 긴급 식량 지원으로 간신히 대규모 아사를 막을 수 있엇다. 다행이 자본과 노동 등 경제 기반은 전쟁과 전쟁 당시 대규모 본토 폭격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 내 중화학공업은 전쟁을 주도했었던 산업인만큼 그대로 패전 이후 일본에게 남아있었고 빠른 시간 내로 전쟁 이전의 수준까지 돌아갔다. 그리고 노동력도 히키아게샤(引揚者, 식민지에서 귀국한 일본인)를 중심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상황이기에때문에 패전 이후의 일본에선 충분한 노동력이 있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전쟁 동안 일본경제는 미국에 의한 해상봉쇄와 일본의 상선단의 80%가 괴멸하면서 처참한 수준으로 망가졌으며, 일본 본토에 본격적으로 폭격이 시작되면서 자원 역시도 심각하게 부족해지면서 일본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미국의 수입 봉쇄는 GHQ가 당초 목표가 다시는 전쟁을 불가능할 정도로 일본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기에 계속 유지되었고, 이는 일본의 무역 수준을 매우 낮추고 경제 회복을 방해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안정본부(経済安定本部)를 중심으로 한 통제 경제(Command Economy)가 부활했고, 그 중 전형적인 방법으로써 에너지 산업과 제조 산업의 기본이 되는 석유와 철강업의 생산회복을 최우선으로 한 '경사생산방식(傾斜生産方式, Priority Production)'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사생산방식은 일본의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되었는가 아니었는가는 불명확하다는 시각이 있다. 이 경사생산방식은 생산력을 증가시켰다는 것보다 일본 정부가 자조력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로써 더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패전 이후 일본이 생산 수준을 회복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점령지역 구제 및 경제 부흥 기금(GARIOA 및 EROA 원조 기금)'를 통해 일본에 약 18억 달러(그 중 7억 달러는 무상)의 경제원조를 지원해줌으로써 중유와 철강석 등의 기초 원자재를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이유이다.

더욱이 일본의 비군사화를 위한 경제 약화라는 GHQ의 초창기 목적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구소련과의 군사 대립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듯 국제 상황이 혼란스럽다보니 일본의 경제를 발전시켜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권의 성장을 저지하고,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주요 지점으로 만드는는 것이 미국에게도 있어서 이익이 되었다.

전쟁과 배급 혼란, 그리고 히키아게샤(引揚者) 유입으로 인해 일본은 생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원활하지 않은 원자재 수입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제품 가격을 억누르는 동시에 기업의 생산 증가를 위해 보조금과 부흥금융공고(復興金融公庫)를 통해 기업 융자를 증가시켰다. 이 보조금과 기업 융자의 원천은 일본이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일본은행이 떠맡은 식으로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해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매우 증가하게 되면서 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일본은 패전 이후 5년 동안 소비자물가가 연 평균 40% 이상 증가하였다. 이 기간 동안 물가 상승을 뺀 실질경제성장률은 평균 9.4%로 높은 성장률을 만들어냈고, 생산량과 고용은 점점 회복해갔다.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농지를 강제적으로 매각해 구(旧) 지주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 가치를 대폭 낮추며, 국민 일부에게 부담을 넘기는 등의 교란적인 소득분배를 진행했다.

이케다 하야토(좌)와 조셉 도지(우)

이러한 일본 경제의 혼란을 막기 위해 트루먼 미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조셉 도지(Joseph Dodge) 공사(公使)는 경제안정계획(일명 Dodge Line, 도지 라인)을 1949년에 실시했다. 도지 라인의 중심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부는 창조하지 않으면 분배되지 않는다'라는 재정 회복이었고, 두 번째는 '부자연스러운 가격 체계를 다시 새롭게 만든다'였다. 즉, 가격 통제, 가격 보조금과 부흥금융공고의 대출 등의 재정 정책을 중단하고, 고전적인 방법인 재정균형주의로의 전환이었다. 세 번째는 1달러 당 15엔이었던 환율을 1달러 당 360엔으로 고정하여 '수출 범위 내에서 수입을 조달한다'라는 무역 수지의 균형 원칙을 만들었다. 이 도지에 의한 엄격한 재정긴축정책은 '증세 없는 재정 재건'과 '시장중시 경제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198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한국에 강력한 구조개혁을 진행했던 IMF의 방법과도 유사하다. 이러한 도지 라인은 수요를 억제하는 거시경제 정책뿐만이 아니라, 가격 통제를 없애는 등 미시 정책도 역시 일본의 인플레이션을 끝낸 것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특수경기. 미군의 주문으로 조명탄을 제조하는 일본 가나가와현 공장

도지 라인은 인플레이션을 멈춘는 것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보조금에 의존해오던 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해고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징세 강화 등으로 인해 불황이 심각해지고 이에 반발하는 노동 운동이 격화되었다. 도지 라인의 긴축재정으로부터 발생하던 디플레이션을 막은 것은 다름아닌 1950년 6월에 일어난 한국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싸우는 미군들의 병참 기지가 되었고, 군수물자를 생산해 미군에 팔기 시작하며 수출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 한국전쟁은 도지 라인에 생긴 디플레이션 갭을 해소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전쟁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군사 대립 격화는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독립 시기를 빠르게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에게 있어서는 한국전쟁이라는 전쟁특수는 1951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게 된 단기적인 일이었다. 오히려, 이후 수출 주도의 일본 경제 발전의 기초를 만들었는 것이 바로 도지 라인에 의한 경제 안정 정책이라는 대수술이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전후 계획 경제 아래에서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탈출하고, 시장 경제로의 복귀를 달성하였다. 또, 전후 유럽과 아시아 각국이 경제를 회복하면서 따른 세계적인 시장 확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유럽의 주요국들이 수출이 지연됨으로 인해 공업생산능력에 여유기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기계 제품을 수출하는 주요국이 되었고, 그 이후에도 자유 무역 체제 아래에서 높은 경제 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미국은 당초 일본의 비군사화에 중점을 크게 두었기에 때문에, GHQ는 일본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일본의 관료들과 공동으로 작업을 하였고, 일본의 관료들과 함께 작업을 한 것이 일본이 다시 경제를 회복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공동 작업으로 인해 도지가 사용한 강력한 재정금융정책의 권한은 그대로 일본의 관료 조직에게 계승되었고, 일본의 주요 관청이 일본 경제를 지도한다는 이전의 전통을 다시 형성하게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관료제민주주의'는 전쟁 당시의 유산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미국의 점령 기간동안 증폭되어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에도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유지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의 1인당 GDP는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1/4 정도가 되었고, 이로 인해 유럽과 미국의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 일본의 국민적인 목표가 되었고, 이는 민간의 기업을 정부가 도와주는 산업 정책을 뒤에서 받쳐주게 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이후 크게 증가한 엔고에 의해 일본의 1인당 GDP가 미국의 경제수준에 도달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관료조직이 명확한 목표가 있는 시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일본이 이후 선진국이 되고, 목표를 잃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정부 주도 경제 운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이후 일본이 장기 경제 침체에 떨어지게 된 한 가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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